80년 항쟁으로부터 10년이 지난 90년 다시 군사독재에서 살 수는 없었다. 이겨야했다. 신계륜은 그로부터 김근태 등과 함께 야권통합을 주장하고 일시 노동운동을 중단하고 상층 정치협상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찾아가 야권통합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재야, 노무현․이기택 등 3당 합당을 거부한 민주당 잔류 세력, 평민당간의 대통합이 추진되었다. 신계륜은 재야를 대표해서 곤란한 협상을 성실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이끌었다. 그 결과 이우정, 김말룡, 박우섭 등 재야와 평민당이 1차 통합을 이루어 신민당을 창당하고 다시 이를 토대로 노무현 등 구민주당 잔류파들과 2차 통합을 이루어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 과정에서 신계륜은 노동운동을 중단하고 더 시급하다고 생각되는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임무 수행에 전념하게 되고 우선 범 민주 수권정당 창당의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신계륜에게 고향인 호남에서, 특히 함평에서 출마를 권유하는 당시 김대중 총재에게 ‘젊은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노란 깃발만 꼽으면 당선되는 호남으로 내려가느냐’고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92년 1월 서울 성북구(을)에 첫발을 내딛고 지구당 개편대회를 열었다. 약 3,000여 명의 청년 및 당원들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지구당 개편대회에서 신계륜은 그의 생애 처음으로 정치인으로 민주당 성북(을) 지역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 뒤인 4월 총선(제 14대)에서 민주당 최연소 국회의원(37세)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92년 말 치러진 대선에서 통합민주당의 후보 김대중은 3당 합당의 주역 민자당의 김영삼에게 다시 패배하여 민주 세력의 최대의 당면 목표이던 민주정부 수립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길은 멀고 상대는 강했다.
그러나 점점 커진 민주연합의 물적 토대는 그로부터 다시 5년 뒤에 그 위력을 발했고 여기에 다시 김종필의 지지 세력과 연대하여 97년 대선에서 범민주세력의 후보 김대중은 승리했다. 광주항쟁으로부터 17년, 87년 6월항쟁으로부터 10년의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의 결실을 비로소 맺었던 것이다. 신계륜은 야권통합을 통해서 민주정부 수립의 물적 토대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이고, 92년 대선에서는 노동특보로서 97년 대선에서는 청년위원장으로 대선에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