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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5-14 11:54
서울역 시위 철수 없었으면 서울항쟁 되었을까
 글쓴이 : master
조회 : 188  

그 날 시위를 보도한 일간지의 사진인데요.

이 사진을 보면 서울역 쪽에서, 광장 쪽에서 서울역 일부가 나오고, 또 고가도로 위에까지 버스가 서 있고, 사람들이 서 있는 모습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서울시 내 35개대생 집결, 서울역으로 모이자. 고대, 동덕여대 성북서 앞서 농성도 이렇게 쓰여 있고요. 또 일부 신문에선 전국 대학생 가두시위 계속, 일부선 격렬해져 가스차 불태워 시청 앞서 저지당해 밤 10시경 해산, 그리고 한때 강경, 자제 토론을 하고 있다 이런 보도를 담고 있습니다.

 

 뭐 이런 시위 현장에 있다가 제가 서울역 앞에, 서울대가 제공한 미니버스 안에서 서울대 학생회장을 포함한 서울시내 학생회장단들이 모여서 철수를 결정했다, 서울역 시위 철수를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헤쳐서 갔잖아요?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죠. 제가 미니버스 앞에 도착해 보니까 서울역 광장 모퉁이쪽에 미니버스가 서 있고,  그 앞에 중년의 어떤 교수 같은 분이 서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이 서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미니버스 안에 문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그 분이 저를 저지를 합니다.

 그리고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어요. 그래서 제가 "저는 고대학생회장 신계륜 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자기는 서울대학교 학생처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의 순수한 행사인데, 더구나 반정부 시위의 모임의 장소인데, 왜 서울대학교 당국이 미니버스를 제공하고, 그 안에서 학생회장단 회의를 할까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급한게 미니버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는게 더 궁금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만 가진 채 그냥 버스 안으로 들어갔어요.

 

 버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한 20여명의 대표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한 두번씩 얼굴을 본 회장들이었고, 몇 사람은 처음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제가 미니버스 안에 들어가서 앉지 않고

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철수를 결정했나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니까 참석했던 학생대표들이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합니다. 속으로 '철수를 결정했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러면 안되죠. 우리가 요구한, 계엄철폐 등의 요구가 단 한개도 들어주지 않았고, 관철되지 않고,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 이렇게 어렵게 서울역까지 연 이틀간 나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학교로 귀가한단 말입니까? 그건 역사에 죄를 짓는 일 아니에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랬더니 뒤에 있는 학생 한 분이, 그 분은 제가 얼굴을 모르는 분인데,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희가 그냥 철수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서 반정부 운동을 하기 위해서 철수를 일단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 그러니까 15일이 었으니까 16일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전국 학생대표자회의를 소집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더 화가 나는 겁니다. 철수를 결정한 것 뿐만 아니라 다음에 전국 대표자 회의까지 소집되었는데, '이건 나는 뭐를 알고 있는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화를 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화를 많이 낸 것을 많이 후회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상황에서 학생회장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충분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대안을 내놓고 이렇게 합시다라고 제안을 했어야 했는데, 제가 좀 다른 얘기들을 많이 했죠. 화를 많이 내면서. 비상계엄철폐를 하러 왔으면 육군 본부로 가야되는 것 아닙니까라는 말을 한다든가, 기타등등 많은 면에서 제가 일생에 남을 정말 저의 신중하지 못한 발언을 화가나서 많이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서울대 미니버스 안에서 내려서 저의 고대 학생들과 동덕여대 학생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서울역을 중심으로 볼 때, 서울역에서 나올 때, 왼쪽, 좌측이 고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 연대하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미니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과연 철수를 실행할 것인지는 지켜보도록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학생들이 미니버스 밖으로 나와서 서울대, 특히 심재철 회장이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부에서 상당히 많은 반발을 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학생회 결정에 그냥 대체로 따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철수가 시작됐습니다. 하나 둘 씩 철수하고, 서울역 앞에, 그 넓은 광장, 시청 앞까지 꽉 채우던 학생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둠속에서 저희 학생들과 함께 서 있으니까 굉장히 고독하고, 외롭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밤이 되었고, 그 많은 학생들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만 남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하고 상의해서 "우리도  철수합니다, 그런데 집으로 가지말고 학교로 갑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철수 경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서울역을 출발해서 남대문 지나서 시청 앞 광장을 지나서, 그리고 광화문을 지나서 종로를 통해서 안암동으로 행진한다 이렇게 결정을 세웠습니다. 물론 비상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이런 외침들을 계속 하면서 가기로 했던 것이죠.

 

 9시경, 9시가 넘어서 서울역 앞을 출발합니다. 출발해서 남대문 앞쪽으로 가는데, 우리가 지나가는 길 양쪽에 앉아 있던 정경들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저희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방패로, 방벽을 쌓았습니다. 길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참 당황했죠. 제가 학생대열을 멈추게 한 다음에 방벽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그리고 "귀가길 안전보장을 한다고 해서 지금 학교로 돌아가는 길인데, 길을 열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앞으로 좀 나와주세요."

이렇게 했더니, 그 방벽 뒤에서 방벽 앞으로 나오지도 않고, 방벽 뒤에서 몇 발짝 앞으로 나오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현장의 지휘관처럼 보였죠. 그래서 그 분하고 얘기를 하면 되겠구나 생각을 하고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분이 소리를 지릅니다.

 "뭐하고 있어? 쏴버려!!"

 순간 저는 당황했죠.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페퍼포그가 제 얼굴 정면에 쏟아지고, 최루탄이 뒤에 있는 대열로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데다가 놀라서 저는 그냥 숨도 안 쉬어지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기절하다시피 쓰러졌어요. 몇 몇 학생들이 저를 부축해서 뒤로 후퇴하면서, 제가 정신을 못차리니까 안되겠다고 가까운 민가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 같더니 민가의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서 양해를 구한 다음에 저를, 수돗물을 뿌려대면서 정신차리게 합니다. 참 기가막힌 일이었죠.

 

 그것이 상징이었습니다. 철수, 안전귀가, 보장 이런 것들이 전부 그냥 하는 말이었던 것이죠. 정말 권력을 쥔 사람들의 생각은 명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그날 밤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서울시내 학생회장단 회의에 잠깐 참석하고, 그 날 밤을 학교에서 세운 다음에 아침에 학생들과 협의해서 고대와 철수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다시 모여서 수유리 4.19묘소까지 가두행진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두행진 준비를 하고 이대회의, 그러니까 16일 밤부터 시작된 이대회의는 이경재라는 총무부장을 보내서 상황을 체크하기로 합니다.

 저는 뭐 이대회의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안 갔는지도 모르고, 또 저희들끼리 독자시위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못 갔던 것도 사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5월 16일날 저희는 수유리까지 가두 행진을 합니다. 저희 학교 학생들 한 2~3천명, 그리고 철수를 반대해서 같이 농성에 참여한 학생들 천여명 이렇게 해서 상당히 많은 숫자가 정문을 나와서 수유리까지 침묵 시위를 하게 되죠. 이 침묵시위에 관한 기사가 있어서 제가 소개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이 시위에 대해서, 그러니까 모든 서울시내 대학들이 교내에 머물면서 이제 조용히 학교의 일상적인 활동으로 돌아갔을 때, 조선일보 기사가 5월 17일자 아침 조간에 이렇게 기사를 크게 쓰고 있습니다. 고대생 2천여명 4.19묘까지 침묵행진했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학교에 머물면서 있는 것과는 달리 고려대학생 2천여명은 16일 오후 3시30분경 교정에서 도봉구 수유리 4.19탑까지 침묵행진했다라고 쓰면서 우리가 마치 우리 학교만 행진을 한 것으로 보도를 한 것이 보입니다.

 

 5월 17일 조간,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광주 9개대 시위 계속, 2만여명 도청 앞 모여 시국성토했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바로 옆에 있는 기사, 가두 시위 일단 중지... 정상 수업이라는 톱기사 바로 옆에 실려있습니다. 이 톱기사는 서울역 철수를 말하는 것이고, 옆에 있는 광주의 기사는 철수한 다음날 부터 광주에서는 가두시위가 본격화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죠. 

 

 서울역에서는 5월 15일, 14일 연이틀 시위가 철수결정으로 중단된데 반해서 광주에서는 16일 부터 본격적인 계엄철폐 시위가 시민들과 시작됐다는 뜻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당시에 서울역 철수를 주장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단 말씀을 첨언 해 드립니다.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고민이 됐습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피해를 줄일까?', '연이틀 시위로 피곤한 학생들을, 피곤이 누적된 학생들을 풀어줄 수 있을까?', '학생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까?', '우리 이 정도 의사표시 했으면 정부당국의 반응을 기다리는게 맞지 않느냐.', '과격한 시위는 정치군인들에게 명분, 개입명분을 주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서울지역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전국적 연대를 이뤄야 나가자.'는 계산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서울지역에서 전 학생명령을 총 동원해서 계엄철폐 요구를 한 날로부터 시작 그 자체가 이미 정치군인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기 때문에 철수 후에 이루어진 전술적 고려는 이미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철수를 반대했던 것인데요. 저는 관철시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탓이 있습니다. 그 무렵 제가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이 고민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이런 고민도 했었어요. 

 

 '그때 내가 화를 내고 뛰쳐나가지 말고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지금 서울역에서 철수하지 말고 이 자리에서 연대하고, 학생들 순차적으로 교대하든 연대하고 전국 대학생 대표자회의를 서울역으로 불러서 서울역 안에서 학생들이 연대한 가운데서 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제안을 했으면 다른 학생회장들이 동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 지나친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 때문에 꿈도 꾸어요. 너무나 제가 그 시절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5월 16일, 17일 그러니까 서울역에서 철수를 한 이후로 이화여자대학에서 전국 학생 대표자 회의가열렸는데요. 16일 부터 시작되었는데, 17일이 되어도 결론을 못 냅니다. 처음으로 시작된 전국 대표자회의였기 때문에 그렇고 또 그 대표자회의의 위치나 그 동안의 경험이 이런 것들이 일천했기 때문에 불가피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5월 17일날 오후 6시경, 군경이 그 회의장, 고립돼 있는 회의장이죠? 고립돼 있는 회의장을 습격하고 끝납니다. 그래서 일부는 체포되고 그 회의는 어떤 생산적 결론도 내지 못하고 첫 회의를 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찾은 채모두 무산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시각이 5월 17일 6시 경이었는데요. 그로부터 다시 6시간 뒤 자정에 결국 군인들은, 정치군인들은 비상계엄 확대를 의결하고, 대학을 휴교령 내리고, 군대를 진주시키고, 수 많은 민주인사들을 체포하게 하고, 학생 대표들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저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졌죠. 현상금이 100만원이나 붙었습니다. 5월 18일 이 상황에 저는 학생회를 소집해서 이 상황은 각자 은신하고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저도 천진난만하게 광주에서 5월 18일날 아침에 학생과 군인들의 충돌이 있었고, 시민들과 충돌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채 수배를 피해서 광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광주항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싸우기 위해서 내려간 것도 아니고, 단지 내가 내 고향이니까 이 어려운 상황을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극복해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려갔는데, 그 날이 5월 18일날 광주항쟁이 시작되었던 날인 것입니다. 저는 그날 5월 18일 부터 5월 28일까지, 도청이 무너진 5월 27일 그 다음날까지 광주에서 머물면서 광주항쟁을 제 눈으로 직접보고,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이것은 진짜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제 인생은 정말 180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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