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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5-07 10:00
서울의봄 계엄철폐 요구 시위. 신계륜 전의원 44년만에 무죄. 서울고법형사2부 설범식부장판사
 글쓴이 : master
조회 : 192  

https://youtu.be/IdzY9lIq3Fk?si=q5Pq76jcwxZKXuqo

 

 2024년 5월 2일, 저에 대한 재심이 열렸습니다. 재심 판결을 내린 날이었죠. 어떤 사건이냐면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제가 행했던 일의 집회와 시위가 계엄포고령 위반이라고 해서 군사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고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요.

 제가 재심 신청을 작년에 했고, 5월 2일날 재심에 대한 결심 선고 공판이 열렸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 2부 설범식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통해서 "12.12 군사 쿠데타로 반란군이 된 정치 군인들이 헌정 질서를 유린하고 파괴했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행위는 정당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무죄를 선고했죠.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44년 만에 무죄 선고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44년 만에 무죄 선고가 아닙니다. 사실은 저는 재심 신청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이미 12.12가 군사 쿠데타로 규정되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재심 신청을 해서 무죄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가 굳이 개인적으로 다시 재심 신청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해서 재심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도 안 하다 보니까 주변에 몇몇 분들이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신계륜씨는 좀 혼자 좀 잘난체 한다. 재심 신청도 안 하고...'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전 재심 신청을 해서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작년에 재심 신청을 했고, 5월 2일 날 무죄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의 봄'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뭔가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신 분들이 참 많죠.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서울의 봄'이라기 보다는 '서울의 봄' 한 해 전 1979년 군인들의 권력 공백기에 벌인 암투, 권력투쟁의 성격이 강해서 이 상황을 보는 국민의 시각, 학생들의 시각 이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죠.

 1980년 서울에 봄은 어떻게 보면 아주 짧습니다. 그러니까 짧은 시간인데도 박정희 대통령이 유고 되고, 또 일부의 언론과 사람들이 희망하기를 이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전진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희망을 표현한 말이 '서울의 봄' 입니다. '서울의 봄' 이라는 표현도 저희가 쓴 말은 아니고 1968년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프라하의 봄' 이라고 말했던 것과 유사한 연상을 주는 그런 단어입니다. 어쨌든 서울의 봄은 그렇게 이제 용어로 정착되었습니다.

 정작 12.12 쿠데타가 일어나던 날 저는 강제징집을 끝내고 만기 제대해서 예비역 병장으로 몇몇 친구들과 같이 서울시내 중심부에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제가 당시 청담동에 살았죠. 길이 다 막혀있어요. 버스 차 트럭 할 것 없이 도로에 일렬로 쭉 끝없이 서있는 겁니다. 그래서 뭐 시내버스를 타지 못하고 한강 다리를 건너서 청담동에 집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한테 '서울의 봄'은 한 3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나는 제가 3월에 복학을 해서 들어가 보니까 학교 교정에 그 전에 많던 사복 형사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 없어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철수한 거죠. '아 교정을 되찾았구나. 학생들이 되찾았구나. 철쭉 꽃 아름답게 피어 있는 고대 교정을 우리가 찾았구나.'하는 생각이 첫째 소감이었고요.

 두 번째 소감은 80년 저희들이 복학하자마자 만들기 시작한 총학생회의 부활입니다. 총학생회의 회칙을 제정하고 공청회 열고 토론회 열고, 그리고 총학생회 선거를 민주적으로 치른 일이었죠. 그때 당시 학교는 학도 호국단 이라는 체계가 있었습니다. 학도 호국단 이라는 이름의 어용학생회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용학생회를 당시에 학교는 유지하려고 했어요. 학생회 부활이 학교에 승인이나 정부 당국의 승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체적으로 노력을 해서 이루어진 것이라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실제로 당국에서는 학도 호국단을 폐지하지 않고 학도 호국단 운영규칙 같은 것을 조금 바꿔서, 어떤 민주적으로 바꿔서, 학도 호국단 체계를 유지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학생들이 그런 말들을 이유가 하나도 없죠. 바로 학생회의 구성을 위해서 부활을 위해서 모두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몇 사람의 추천에 의해서 당시 전교생 직접 선거로 치뤄진 선거에서 당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어요. 제 기억에 한 일곱 명 정도의 후보들이 나왔던 것 같은데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었습니다.

 근데 제가 당선되었고, 일하기도 했죠. 4월 10일 날 선거니까 따지고 보면 학생회 기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5.18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총학생회는 해산되고 학도 호국단이 다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러니까 계산해 보면 4월 10일부터 5.18까지 한 48일간 학생회장으로

학생들이 같이 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 제가 했던 고뇌와 어려움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같이 나눴던 여러 가지 대화는 제 일생을 지배하는 그런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되었죠. 아무튼 그런 짧은 시간의 학생회장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도 고민하고 했던 것이 '서울의 봄'때 학내민주화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조화하고 균형있게 끌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순서대로 되질 않아요. 학내 민주화가 잘 되어 학생들이 의식이 높아지고 학생들이 결의에 차졌을 때 그때 사회에 대고 사회 민주를 요구 하고 비상계엄 철폐를 요구하는게 맞는 순서 같아 보였었는데 실제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2월 12일 날 일부 정치 군인들이 전두환을 필두로 해서 이미 물밑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박정희의 독재 체계를 그대로 이어가려고 하는 꿈을 가지고 실천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라고 하는 것 학내 민주화 하는 것. 무슨 의미가 있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학내 민주화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점차 설득력을 얻게 되죠.

 그래도 사람들은 기대했습니다. '설마 군인들이 또 나설까', '이제 민주주의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군인들은 그런 것을 아랑곳 하지 않았죠.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까 우리가 학내 민주화에 머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5월로 들어가게 되면 각 대학들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토론하고 아 점차 이제 집회나 시위를 많이 하는데, 그래도 총학생 회장단들이 모여서 당분간 교내의 시위를 원칙으로 한다는 원칙을 정했기 때문에 교내에 머물면서 집회나 시위에 감행했던 것이죠.

 그러던 5월 13일 날 고대에도 내부적으로 민주화 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교내에서 집회와 시위를 하고 있었던 그 날입니다. 그날 저녁에 저희 고대 학생회장실에 서울시의 30여개 대학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그날 갑자기 모인 것이 아니고 이미 모이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그때 현황이 생기면 모여서 어떻게 행동 통일을 할 것인가를 의논하게 되었죠. 근데 이 모임에 앞서 제가 일부 학생회장단들과 비공개로 약간 교감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교내시위로 머무르는 건 한계에 도달했다. 이런 정치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정치군인들의 움직임 고려해 볼 때 밖으로 나가서 정치 군인들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국민들에게 직접 설득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졌다. 이제 고뇌의 시기를 접고 가두로 나가자는 뜻을 전달했다. 이런 뜻에 공감한 대표적인 학생회장들은 서울대학교 심재철 학생회장과 유시민 대의원회의장, 그리고 안숙 이화여자대학 학생회장,형난옥 숙명여자대학 학생회장, 윤여현 회장님 등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저의 뜻에 또 그분들의 뜻에 서로 공감하게 되었죠.

회의 벽 뒤에서는  그런 의지를 꺼냈습니다. 이제 교내투쟁 원칙을 접고 가두 투쟁으로 나갑시다. 바로 내일 각 학교는 오전에 학생들에게 그 뜻을 전달한 집회를 갖고 학생들의 동의를 얻어서 가두로 진출합니다. "목표는 서울역입니다." 이렇게 의견을 제안했고 모든 학생회장들은 반대 없이 그 안에 수용했습니다. 정말 비장한 학생회장단들을 모임이었습니다. 제 이야기에 모두 다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비상 계엄이 철폐 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뜻이었고, 결정이었고, 실제로 그런 마음을 모두 가지고 학생회장단들이 그런 결정에 따랐던 것입니다. 서울역으로 정한 이유는 서울역이 동서남북에 서울에 산재에 있는 대학들이 모이기 쉬운 중앙에 위치해 있고 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지방대학에 참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서울역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이날 아침 14일 아침이 되었죠. 13일 밤새 심야 회의를 하고 14일 아침에 동이 트기 전에 각 대학 종학생회장들은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데 제가 정문까지 따라 나가서 굳게 악수하면서 우리 언젠가 다시 봅니다. 그때 다시 우리 얘기합시다. 이렇게 결의했습니다. 실제로 저희들은 그때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근부독재가 물러나거나 비상계엄령이 철폐하거나 아니면 우리 모두 감옥에 간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4일 날 저는 아침 9시에 학생들을 대운동장에 모이게 했습니다. 고대 학생들이 약 4~5천명, 그리고 동덕여대 학생회에서 동덕여대가 아무래도 서울역으로 진출하는데 고대와 함께 하겠다고 동덕여대 학생들이 한 2,000명이 고대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6,000 내지 7,000명의 학생들이 모이는 앞에 저는 담백하게 얘기했습니다.

 "이제 교문을 박차고 가두로 나가서 비상계엄 철폐 때까지 싸웁시다. 오늘은 서울역으로 향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바로 정문을 돌파해서 서울역을 향해서 뛰거나 걷거나 하면서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했습니다. 이 행렬은 장엄했습니다. 매우 길고 신중했으며 아주 단결해서 나갔습니다. 가다가 여담이지만 중간에 서울역 가는 길에 고대 학생들과 동덕여대 학생들이 함께 나가다가 성북경찰서를 포위를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간담이 서늘해진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후일담을 들어보니까 안에 있던 형사 몇 분은 만약에 학생들이 들어 오면 권총을 쏴서 자살하려고 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북경찰서가 그동안 6년 간 유신헌법체계에서 학원 사찰을 담당한 주범들이 다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저는 포위을 풀고 빨리 서울역으로 가라고 설득을 해서 바로 서울역을 가게 되었습니다. 14일 날 서울역에는 약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꽉 매웠습니다. 그 위에 있는 고가도로까지 완전히 매웠습니다. 인도 차도 모두 점령했습니다. 차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또한 10만여명의 광장에 모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 약 10여만 명은 서울 시내 곳곳을 행진하면서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 등 신군부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소리지르고 유인물을 뿌리고 나누어줬습니다. 그러니까 서울역 앞에 모인 사람들이 약 10만, 교외 서울 시내에서 유인물 잡고 대국민 홍보를 하던 사람들이 10여만 명 도합 한 20만 명이 그날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14일 날 15일날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죠. 14일 밤은 각자 대학으로 돌아가서 토론회 등으로 밤을 새고 15일 날 다시 학교를 출발해서 서울역으로 모이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서울역이 모이는 이런 집회가 연일 계속된 거죠. 저는 상황실에 있다가 너무 상황이 궁금해져서 전 뭐 현장 그런 생각입니다. 현장이 궁금해져서 오후 2시경부터 이제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서울시청 앞으로 나갔죠. 나가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대치선 바로 앞에서 시위에 합류 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갔을 때 경찰 바리케이트  대치선과 학생 시위대 앞부분은 100M 정도 차이밖에 없었죠. 경찰들은 끊임없이 페퍼포그를 쏘아서 숨막히게 만들고 최루탄을 무차별로 발사를 해요. 최루탄도 터지는 바람에 부상당한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학생은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점차 밀면서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15일 날 제가 한순간 어떤 걸 페퍼포그 안개 연기 속에서 어떤 걸 봤습니다. 한 사람이 허름한 차림을 한 사람이 시내버스였던가 경찰 버스였던 것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버스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더니 엔진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차를 경찰 바리케이트 쪽으로 돌진했습니다. 차가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꽝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리고 안개 속에서 그분은 운전했던 그분은 페퍼포그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뭐지, 이 상황이 뭘까'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죠. 나중에 보니까 사망자가 생겼죠. 경찰쪽에서. 하여튼 그때는 그런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을 본 사람은 일부 학생들 뿐이었고 나머지는 대개 보지 못했죠. 뒤에 있는 사람을 계속 밀면서 나는 몸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앞에 있는 사람이 밀리면서

점차 점차 페퍼 포그 연기 속에서 바리게이트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한 50M까지 가까워졌어요. '아 이거는 경찰 바리케이트가 무너지는건 시간 문제로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제 눈앞에 또 한 번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갑자기 바리케이트를 방어하던 경찰들이 그 자리에 경찰들이 길가에 그 자리에 전부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 페퍼포그 발사가 중지되고 최루탄 발사도 중지 되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하고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경찰 쪽에 확성기에서 방송을 하는 겁니다. "학생 여러분 오늘 시위는 여기서 중단하고 돌아가기로 학생 대표와 결정 했습니다. 속히 학교로 돌아가시기 바라겠습니다. 또 귀가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이런 방송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전진해 가던 학생들은 이상한 상황이 생긴 것 때문에 이해를 못하고 어리둥절 하고 있습니다.

 근데 제 뒤에서 어떤 분이 소리를 저한테 "신계륜 학생회장,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빨리 가보세요 학생회장단 모임에 빨리 가보세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저도 모르는 학생회장단 모임이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지금 어디서 누가 모여 있는데요?" 이렇게 물어봤더니 서울역 광장 바로 옆에 서울대학에서 제공한 미니버스 안에

전국의 서울 시내 학생회장단 대표들이 모여있다고 합니다. "빨리 가보세요." 그럽니다.

 그래서 저는 시청 앞에서 다시 방향을 몸을 돌려서 인파 속을 뚫고 지나 가려고 하니까 잘 뚫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학생 10여명이 길을 트면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길을 양보해서 이렇게 해 가지고 겨우 뚫고 뚫고 나가서 이른바 서울대가 제공한 미니버스, 작은 미니버스 앞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4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울역 앞에 세워진 미니버스 앞으로 제가 가서 했던 이야기와 그 뒤에 전개된 일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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