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작은 깨달음
토론토는 다민족 도시로 유명하다.
거리를 걷다 보면 세계의 모든 인종이 모인 인종 전시장 같아 보이기도 하다. 이것이 도시 발전의 역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도시 혼란의 요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나는 아는 목사님의 안내로 이곳에 유학온지 10여년이 넘는 아들을 보러 이곳에 왔다.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곳으로 와 공립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를 전공하는 전문대학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민을 혼자 소화해낸 아들이기 때문에 애틋하다. 매달 보내주는 작은 유학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거의 매일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남의 눈치를 보며 예민한 10대를 보내고, 지금도 여름방학 때 한 협동조합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려고 작심하고 토요일 근무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아들을 보니 더 애틋하다. 국회의원인 아버지는 기소되고 유학비 시비를 건 야비한 검찰 때문에 노심초사했다.
아들 숙소 곁 작은 방에서 여러 날을 함께 보내며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분명히 보았다.
(사) 신정치문화원 토론토지부를 만들었던 한 친구가 이곳에서 남몰래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여 새벽에 일어나 그 친구를 따라 홈리스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다운타운의 한 건물을 찾았다. ‘마가렛’이라는 이름의 이 봉사단체 일꾼들은 아침식사 준비에 분주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만 소개하고 계란 후라이를 하는 작업을 도왔다. 7시부터 9시경까지 나는 200여개의 계란을 바쁘게 요리했다.
전문 요리사 40대 백인 남성은 아마도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보였고 나머지 5~6명의 봉사자들은 첫눈에 보아도 헌신적인 사람도 보이고 눈에 띄게 어색해하는 봉사자도 보였지만 요리와 배식의 그날 봉사활동은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침 식객들은 남녀는 물론, 백인, 흑인, 황인의 구별이 없었지만 나이는 대체로 50대 이상으로 보였고, 대부분은 홈리스이지만 인근에서 아침을 먹으러 온 가난한 주민들도 있어 보였다. 한국인처럼 보이는 동양인도 있었지만 나는 말을 해보지는 않았다. 식사하는 강당 모양의 공간 위쪽에는 지난 시절 이 시설이 교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교회 상징물들이 남아 있었고, 요리와 배식을 하는 좁은 공간 옆 작은 사무실의 열린 유리창 안 책상 위에는 콘돔이 가득 든 바구니가 2개 놓여 있어 매우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눈이 나빠 커피에 설탕 대신 연신 소금을 넣는 사람, 거동이 불편해서 커피와 접시를 양손에 잘 들지 못하는 사람, 후라이를 한 개 더 달라고 버티는 사람, 우유를 쏟고도 이를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 한 손에 후라이를 들고 서서 후라이를 달라는 사람, 자기 아내가 온다고 앉지 않고 서서 기다리는 사람, 내가 중국인인 줄 알고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말로 뭐라고 말하는 사람, 까닭 없이 나를 노려보고 서있는 덩치 큰 흑인 남자 등등의 군상 앞에서 어려 차례 토론토를 방문한 적이 있는 나는 다소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이전에 토론토에서 무엇을 본거야’
10여일의 토론토 방문 그리고 작은 깨달음 2개, 가족과 사회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임 그리고 죽어가는 감성에 대한 나의 반항과 애환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토론토 체류 마지막 날인 오늘밤 나는 교외로 나가 너무 선명한 북두칠성을 오랜만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