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큰아들이 아들을 낳았다. 내가 손자를 본 것이다. 보호유리막 너머 살펴본 나의 손자는 작기도 하다. 2.8kg이라니, 그래도 한마디 해주고 싶어 나지막하게 말해본다.
“나의 불행이 너를 오히려 복받게 할 것이다”
작은 연립주택 하나 전세 얻으려고 1억이나 은행에서 융자내어 결혼한 아들. 4선 국회의원 아들이지만 내가 아들에게 전세자금으로 준 것은 3000만원이 전부이니 노원구에서 1억 3천의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하게 한 아버지는 정말 미안하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회사를 다니다가 전망이 보이지 않자 사직하고 무언가 독자적인 사업을 해보려고 노력중이지만 얼마나 전망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며느리는 출산이 다가오자 작은 병원의 간호사직을 사직했다. 명색이 국회에서 노동법 전문가인 시아버지가 있는데도 근로기준법 위반이라는 나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출산하고 다른 곳에 가면 된다고 하며 손사래를 친다. 내 아들만 그런가. 대부분의 대한민국 청년들의 고달픈 삶의 현장이 아닌가.
아들은 내가 노동운동에 전념할 때, 관악구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나는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부모님이 살던 전남 함평의 시골집에 맡겨서 키웠다. 얼마간 떨어져 살던 사이 시골로 찾아간 부모의 얼굴을 아이가 보고 당황해하며 낯설어하던 모습에 나는 아이가 부모의 얼굴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내 주변을 돌고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내가 바라보면 구석으로 숨던 아이가 너무 안쓰러워, 나는 다음날 아이를 어릴적 내가 놀던 앞 들판의 논두렁길로 손을 잡고 나갔다. 눈을 감아도 걸을 수 있는 길을 걷는데 뒤 따라오던 아이가 갑자기 내 앞으로 나가며 물꼬를 트려고 끊어놓은 논두렁길을 모션도 크게 뛰어넘었다. 나에게 여기는 뛰어야 한다고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살펴보니 물꼬 때문에 끊긴 논두렁 길이 잡초로 우거져 잘못하면 발이 물에 빠지게 되어있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펄펄 뛰는 아이의 6감을 한꺼번에 느꼈다. 그래 내가 너의 아버지란다.
“군사독재와는 같은 하늘에 살지 않겠다”는 나의 맹세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처럼 온 가족의 고통을 수반했고, 지금 나는 또 다시 광야에 홀로 선 채로 또 다른 비바람을 맞고 있다. 그러나 아들은 나에게 늘 말한다.
“존경합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