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4일자 김영한 정무수석의 비망록에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를 기록하고 있다. 김기춘은 이날 사정활동 강화를 지시하면서 지위고하, 성역없는 사정을 지시한 것이 아니라 “정권,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세력에게 “두려움을 갖도록”해야 하며 그 대상으로 “독버섯처럼 자란 DJ 노무현정부 인사”를 지목했다.
나는 그 지시의 1호 타켓이 되어 2014년 7월 7일 한 학교의 이사장으로부터 입법로비로 돈을 받았다는 진술을 받아냈고 이를 시작으로 2014년 한해 동안 거의 20여명에 이르는 ‘두려움을 갖게 해야 할’ 야당의원들의 이름과 액수 등을 기록하고 있다. 김기춘의 그런 지시가 있기 전에는 김영한 정무수석의 비망록에 ‘두려움을 갖게 해야할’ 야당의원들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는다.
하기야 나는 이제야 알았지만 그 무렵 김기춘은 현역의원이며 국회 상임위원장인 나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관리하고 있었다니 조금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되살아난 유신의 망령을 보는 것 같아 다소 오싹하기도 하다.
“우리가 남이가. 김기춘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김기춘을 압박하던 유병언은 죽었다고 하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지금의 특검에서조차 그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
김기춘실장은 무서운 사람이다.
그는 망국적 지역감정의 원조이고 유신헌법의 발상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는 그 살벌한 유신시대에 중앙정보부 5국(대공)장을 지냈다. 김영한비망록에서 김기춘의 살벌한 발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는 공작에 능하며 인권이나 민주 따위의 단어는 없는 사람이다.
나와 그와의 악연도 깊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나는 70년대 중반 내란죄로 수사를 받으며 중앙정보부 5국장 김기춘을 만나게 되고, 80년 서울의 봄 때 전국적인 시위를 이끌 때 그는 서울중앙지검공안부장 맡게 되며, 2004년 국회에서 노무현대통령 탄핵을 주도하던 국회법제사법위원장 김기춘과 만나게 되고, 그리고 다시 박근혜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등장한 김기춘을 보며 그의 놀라운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비겁한 사람이며 그의 허황된 애국심도 나치의 것보다 실로 형편없이 낮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애국심으로 진보의 탈을 쓴 반역자들을 퇴치시키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으며 그것은 대통령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면 그가 반역자이지만 차라리 소신있는 반역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