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계륜이사장이 2018년 11월 28일 송파평화학교에서 ‘한반도 평화의 역사와 과제’라는 제목의 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얼마 전 파주를 가서 도라전망대에 올라가 파주에서 개성공단과 개성으로 가는 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날 38선과 DMZ지역을 지나 선명히 보이던 그 길은 우리가 걸어서 가야하는 길이었다.
조금 멀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1904년 러일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일본이 당시 러시아에게 38선을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제안(이 제안은 러시아가 거절해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을 한 것이 한반도 최초의 38선의 역사가 되었고, 이후 1945년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하면서, 미군이 소련군대의 한반도 진주를 정지시킬 목적으로 38선을 설정한 것이 오늘날 비극의 민족 분단선이 되었다.
1950년 시작된 6.25 전쟁에서 미국은 2번의 핵 사용을 검토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전쟁 이후 1957년부터 미군은 우리나라에 배치된 미사일과 장거리포에 핵탄두를 장착하기 시작해서 1972년에는 763개의 핵탄두를 장착했던 적도 있으나, 1989년 부시-고르바쵸프 회담으로 냉전이 무너지면서 한반도에 배치된 핵무기는 모두 철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냉전질서의 붕괴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지켜본 북한은 체제생존을 위해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기울 것으로 보이며 이때부터 미국을 위시로한 서방국가들과 한국은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협상과 파기 그리고 전쟁의 위기를 몇차례 겪었다. 지금도 한반도는 그 과정 속에 있다.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19년만에 남북간에 이루어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 선언은 남북관계의 평화적 발전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대로만 이루어졌으면 오늘날의 핵문제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북풍의 상당한 영향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의 1991년 합의를 사실상 폐기했으며, 이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 징후는 좀더 뚜렷해지고 미국은 북한 제재와 전쟁의 준비에 돌입하는 위기의 상황이 왔다. 김대중 총재를 비롯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카터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과 김일성과의 합의(북미 고위급회담 이전에 북한 핵개발 임시 동결, 추방 예정이던 IAEA 사찰 용원 2명의 잔류)는 이 위기를 평화적으로 극복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어 1994년 10월 21일 북미기본합의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북한의 핵 개발을 중지시키고 전쟁이 아닌 평화의 길을 여는 발판이 되었다. 특이하게도 당시 김영삼대통령은 제네바협정을 반대했으며(그냥 놔 두면 북한이 붕괴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마지 못해 수용하고 나서 그 수용을 강력 주장했던 당시 한승주 외무장관을 해임했던 일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나는 그 무렵 37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어 여러 자료들을 보고 제네바협정이 잘 지켜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1년 1월 20일 클린턴의 임기가 끝나고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고(나는 부시의 한반도 정책을 알아보기 위해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었다), 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하자 사태는 다시 급변했다. 2002년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칭하고 존 볼트 국무부 차관보는 군사적 공격 대상으로 첫 번째 이라크, 두번째 북한, 세번째 이란을 거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 12월 31일 IAEA 감시관이 북한을 떠남으로서 소중한 제네바협정은 파기되었다.
제네바협정의 파기는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한 다른 대안 없이 이루어짐으로써 사실상 그 동안 이루어지고 있던 북한 핵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소멸을 의미했다. 실제로 이 날로부터 4년여만인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최초로 핵실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북한의 첫 핵실험이 이루어진 직후 미국은 붕괴되지도 않은, 그리고 이제는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다시 협상장에서 만나야했다. 그런 협상과 파기가 반복되는 사이 북한은 2017년 9월 3일 제6차 핵실험이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6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했다.
그 동안 남북 정상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역사적인 6.15 선언 이후 최근까지 5차례 이루어졌고, 특히 2007년까지 다시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던 북미관계는 200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대화가 이루어지며 역사상 처음으로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기도 했다. 핵 문제에 관한 한 북미간의 대화가 중요하며 우선이지만 그렇다고 남북관계가 북미관계의 종속 변수는 아니다.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며 그릇된 정보로 인한(또는 호전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있을 수 있는 혼란과 전쟁의 위험을 막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전쟁을 중재하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를 중재한다. 북미관계 개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가 북미관계를 추동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한국지도자로서 당연한 임무이다.
긴 세월 동안 북한과 미국의 타협과 파기가 반복적으로 일어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생각의 차이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의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의 중단을 요구한다. 미국은 우선적으로 북한핵의 포기를 요구한다. 1990년대 이후 체제위기에 봉착한 북한은 총력을 다해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그것을 통해 미국의 불가침 약속을 받고 국가로서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하는 반면, 미국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북한을 변화시키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에 긴 세월 동안 반복적으로 타협과 파기를 계속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대립의 역사를 보고도 앞으로도 그런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버리는 것과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버리고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은 그러므로 갑자기 일어날 수 없다. 점차적으로 단계적으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 사이에 전쟁의 유혹은 어느쪽에서나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세력이 어디에든 존재한다.
평화의 길은 멀지만 한 단계 한단계 밟고 넘어가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내가 2009년부터 ‘걸어서 평화만들기, 한라에서 백두까지’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걸어서 38선을 넘어 백두산까지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