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에서 가장 그립고 아름다운 여인과 단 둘이 2박 3일 동안 금방이라도 첫눈이 올 듯한 2018년 늦은 가을날 여행을 떠났다.
얼마간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신다. 3번의 수술로 혼미해진 정신 탓인가 24시간 간병이 필요해져 요양원에 계시지만, 요즘 많이 회복되어 나는 다소 모험적으로(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2박 3일 동안의 둘만의 여행을 감행했다. 그 동안의 수술비로 여유 돈을 다 쓰시고 노인연금이 유일한 수입원이 된 어머니는 여행 내내 내가 쓰는 작은 돈을 마음 아파하신다. 내가 운전석에 앉고 조수석에 어머니가 앉았으며 뒷자리나 트렁크에는 휠체어, 보행기, 옷가지 등을 가득 싣고 휴게소마다 들려 휴식을 취했다. 어머니는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군것질도 하고 즐거워하셨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장애인 또는 가족 화장실이 잘 마련되어 있고 바로 그 앞에 장애인 주차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편리하다. 다만 장애인 주차장의 경우 실제 장애인이 타고 있는지 여부가 아니고, 장애인 차량으로 등록된 차량인지 아닌지를 중심으로 우선 주차를 허용하고 있어, 장애인 차량으로 등록되지 않은 차는 걷지도 못하는 실제 장애인을 태워도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할 때마다 눈치를 보아야 하는 문제를 보았다.
전남 광주에 도착해서 내 머리를 깍는다는 핑계를 대고, 어머니를 미장원에 모시고 가서 그 동안 돈 아끼느라 하지 못한 염색과 머리 단장도 해드리고 그 사이 어머니를 기억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내 친구들을 불러 인사드리도록 하는 일 등이 나에겐 행복했다.
첫날 저녁 광주의 동생 집에서 거실에 자리를 펴고 누운 어머니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따라 일어나는 나를 의식해서 소리 없이 일어나려고 하지만 거실 바닥에서 혼자 일어나려고 애쓰는 어머니를 내가 눈치 채지 않을 수 없다. 자다가 일어나기를 열번쯤 하고 아침에 이르자 걱정이 되었다. 오전에 고향인 전남 함평 월야에 들려 고난의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고향의 어른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어머니가 아프실까 걱정이다. 40여분의 고향 어른들이 모인 자리는 실로 고향 특유의 사람 냄새가 가득 풍기는 그런 정경을 연출했다. 큰 수술을 3번이나 했다고 하는데 병문안 한번 가보지 못한 고향 어른들의 미안함을 전하는 인사가 대부분이었으며, 갑자기 연락을 받고 나서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는 어른들도 있었다.
“서울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우리집으로 와서 사시오. 신선생댁(교사였던 아버지 부인을 일컬어 신선생댁이라는 뜻)”라고 고향 마을의 타고난 농부였던 병갑 형(별세)의 부인이 말했다는 어머니의 전언은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근처의 아버지 산소 앞까지 휠체어에 의지해서 간 어머니는 주저 없이 혼자 일어서서 두 손을 땅에 대고 큰 절을 하는데, 두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아 거의 땅에 엎드린 자세로 되어 옆에서 보기에도 몹시 민망스럽고 힘들어보였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계시다가 낮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딱 한마다를 하신다.
“오랜만이요”
나로서는 그것이 그리움인지 회한인지 서러움인지 반가움인지 원망인지 알 수 없다. 단지 그 한마디가, 아버지가 2000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부터 18년 동안 어머니가 가슴에 품고 있었을 말이며, 큰 절을 하는 그 순간 어머니의 가슴에서 입을 통해 스쳐가는 바람처럼 자연스레 터져나온 인사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전에 한번도 어머니가 아버지 무덤 앞에서 그렇게 큰절을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날 밤은 어제와는 달리 어머니는 마치 모든 것을 쏟아부어버린 사람처럼, 초저녁부터 아침 늦게까지 깊고 깊은 잠에 빠졌다. 어머니의 남동생 3형제 창복, 복환, 복남(해남에 거주하는 장남인 동생 창복은 병환이 심해 만나지 못하고)을 만나고 다음날 귀경하는 차 안에서 깊을 대로 깊어진 가을의 황량함을 바라볼 뿐 91세의 어머니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겨울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