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5.18관련 3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5월 단체들의 여러 움직임이 나타나며, 나도 나의 5월을 더듬어보기 위해 5월보다 조금 이른 봄나들이를 광주로 나선다. 책장 한켠에서 한 권의 책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다. 광주항쟁의 선봉에 섰다가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서 오랜 단식 끝에 1982년에 10월 12일 사망한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열사를 기리기 위해 '광주의 넋 박관현'(사계절 발행)을 펴내려고 모였던 사람들, 임낙평, 조양훈 등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집 옷장 가장 밑바닥 깊은 곳의 낡은 가방 속에는 어려운 시절 내가 들고 다녔던 그 책의 빛바랜 교정본 원고가 아직도 먼지 속에 깊게 잠들어 있다.
비디오 아트 작가인 이이남 작가가 만든 '광주의 빛'이라는 작품이 언제부터인가 설치되어 있는 황홀한 지경의 광주톨게이트를 지나 담양으로 들어가자, 표정 맑은 그의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는 조양훈의 담양집이 동네 모퉁이 한켠에 웅크리고 있다. 잘 키운 아들들의 사진 너머 오래전에 정치권을 떠나 살아온 길고도 소담한 그의 흔적들이 그 집의 간판 '우리식물연구소'만큼 호박처럼 투박하다.
광주항쟁의 기록자이자 증인인 그는 지금 언제부턴가 전국의 산하를 떠돌며 벼과와 사초과 식물을 중심으로 식물채집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한반도의 산하에서 이름 없이 피고 지는 미기록 식물을 찾아 '물그렁', '애기개울미', '들겨이삭' 같은 이쁜 이름을 붙혀준다. 작은 그의 앞뜰에는 그가(또는 그의 아내가) 심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중의 무릇' 이라는 풀잎이 아주 작은 꽃이 피어있다. 아마 한반도 구석구석을 떠돌며 그는 전두환의 군대에 맞서 싸운 또는 산화한 이름 없는 민주의 전사들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5월 광주항쟁의 정신은 이제 5월에만 있지 않고 1년 12달 항상 깨어있으며 광주에만 있지 않고 한라산에서 태백산맥을 따라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오히려 이름 없는 잡초 속에서 별빛처럼 반짝반짝 다시 태어나면서 새로운 세대와 함께 이 나라 민주주의의 토양을 만들고 있다.
5.18은 이제 국민이 대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