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봐도 좋은 법 ‘근로자직업능력개발법’ 개정안과 누가 봐도 “아름답지 못한 수사” 사이에는 언젠가 나타날 빨간색에서 보라색까지 무지개가 있어 보인다. 박근혜정부 때 청와대, 검찰, 경찰, 언론, 국세청, 김씨, 나를 비롯한 3명의 국회의원들과 국민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색깔 말이다.
문제의 김씨도 사건 전 과정에서 보면 희생자이다. 아마도 그는 평생 일군 학교사업을 잃지 않으려고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시사직격이 이 문제를 다룰 때 병원에 입원해야 했을 정도로 아픈 악몽이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특수활동비도 있다.
나는 재판과정에서 2013년~2014년 5월까지 김씨가 돈을 주었다는 시기에 월별로 나의 지출총액과 수입총액을 계산해서 월별 수입총액이 지출 총액보다 훨씬 많음을 증명했다. 즉 주었다는 돈의 출구가 없음을 증명하는 은행자료를 법원에 제출했다. 지출총액에는 해당 시기의 월별 공적, 사적 지출(현금)을 합산했으며, 수입총액에는 해당 시기 월별로 국회의원 세비통장과 후원회통장 그리고 환경노동위원장 특수활동비 통장에서 인출한 현금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2심 항소심에서 검사는 공과 사의 구별 없이 총액으로 표시된 수입 지출의 총액을 담은 나의 은행자료를 엉뚱하게도 사적 지출인 아들의 유학비를 특활비로 지출했다는 기발한 주장을 했다. 검사의 일방적인 주장은 여과 없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후 내려진 2심 판결에서 2013년에서 2014년 4월 사이에 주었다는 돈은 모두 무죄가 되었고, 2014년 5월 15일 나에게 마지막으로 지급된 특활비를 끝으로 환경노동위원장 임기가 끝나서 더 이상 특활비를 받지 않았으므로 특활비에서 유학자금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이것을 보도해준 언론은 없다. 오히려 이후 특활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내 둘째 아들 이름이 거론된다.
과일장사로 어렵게 생활하는 큰 아들은 나의 사태 이후 공항장애라는 병으로 지금껏 치료받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7년 동안 내가 모시던, 나를 전적으로 의지하시던,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내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2번의 큰 수술로 아주 불편하신 상태로 양로원에 들어가야 했다.
92년 성북구에서 당시 민주당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지금까지 영광과 시련을 함께 해온 성북구 구민들에게 두말할 필요 없이 큰 죄를 졌다. 그래도 창립 12년째를 맞은 <걸어서평화들기>의 신정치문화원의 회원들은 휴전선을 걸어서 넘어 백두산에 이를 날을 기다리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결속하고 회비를 내며(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액수는 오히려 늘었다) 나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내는 회비로만 20년 넘게 같은 사무실에서 임대료를 내고 운영하고 있는데, 사무실이 있는 5층 건물이 아예 내 소유라는 헛소문을 내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하다.
시사직격 방영 이후 당에서는 안민석, 김종민의원 등이 중심으로 합리적인 대책을 세워나가고 있다고 하며 이낙연 당대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으며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의 길은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나의 길을 묵묵히 걸을 것이다. 좋은 정당에 대한 그간의 경험과 연구, 민족의 숙원인 남북의 평화와 통일의 길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