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서울역 철수가 없었다면 서울 항쟁이, 전국 항쟁이 일어났을까?”
또는
“연이틀의 시위가 신군부의 개입을 만들었을까? 서울역 철수가 신군부의 개입의 호기를 만들었을까?”
80년 이후 내가 생각해오던 의문들이다.
서울역 시위와 철수 이후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려지고 군이 투입되었다. 학생들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을 저항에 실패했는데 광주에서는 학살에 정면 대항하는 항쟁이 일어났다. 어쨌든 광주항쟁은 서울역 철수를 더욱 초라한 것(또는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항쟁 기간 내내 주요 수배자가 되어 광주에 있었던 나는 총을 들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늘에는 투항을 권유하는 삐라가 휘날리고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금남로 거리가 계엄군의 군화 소리로 가득 채워지며 항쟁의 본거지 도청을 계엄군이 점령하던 날, 광주 시민들은 담 너머 골목으로 악령처럼 스며드는 계엄군의 모습을 육감을 동원해 느끼며 영원히 잊지 못할 그날 새벽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을 명백한 ‘적’들에 대한 굳은 맹세로 입술을 깨물며 소리 없이 울었으리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품고 사는 법이다. 그러나 그 의문만큼이나 강하게 나의 영혼을 거듭 깨우는 한 시민군의 이야기가 있다. 군의 진입이 목전에 다다른 시점에 시민군 윤상원은 나이 어린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총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 살아남아서 이를 기록하고 전하라고 말하고 자신은 도청 안에서 불꽃처럼 산화했다. 그리고 그 후배들과 아들딸들은 시간을 넘고 또 넘고, 광주의 학살과 항쟁을 전국에 전하고 또 전했다. 광주의 진실이 넓게 알려지며 6월 항쟁의 바다가 만들어지고 뒤이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며 급기야 촛불에 이르러 ‘산자여 따르라“라는 광주항쟁은 대를 이은 전국항쟁이 원천이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긴 항로에서 모든 사람이 일직선으로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때때로 지그재그의 선들을 한데 모으는 동의를 만들어내고 급기야 불멸의 새 항로를 개척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