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에서 백두까지 함께 걸으며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자고 결의하던 그 시작점인 제주에서 새해를 맞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그 14년의 세월이 무효가 되었다는 회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14년이 아니라 140년의 세월이 흘러도 기어이 하고 말겠다는 결의의 충동이 새해 벽두부터 폭풍처럼 다가왔기 때문이었을까?
2009년 걸어평화만들기를 처음 시작한 한라산 관음사를 찾아 어딘가 있을법한 초심의 흔적을 둘러보고, 강정마을 길 너머 해군기지를 위아래로 오가며 걷고, 너무나 억울해서 처음에는 걷다가 이내 총알처럼 달려 아득한 하늘의 나라로 육신을 날려버린 서귀포 故김재윤 의원 묘소도 찾아가 보고, 한 10번 쯤 걸었을 올레 6, 7길을 또 걷고 또 걸어도, 뭔가 몸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데 그것이 회한의 피인지 결의의 피인지, 과거의 심장인지 미래의 심장인지 알 수 없다.
"걷는다고 평화가 오나요?" 라고 묻던 한 나그네를 회상하면서, 차를 타고 한라산 1100고지에 올라 눈 속에 얼어붙은 산악인 고상돈의 동상을 그 조각가 조주현과 함께 쳐다보고, 다시 내려와 따스한 햇살 속의 산악인 오희준 동상을 역시 그 조각가 조주현과 함께 다시 쳐다보고는, 그제야 내가 그저 잡담 속에 묻혀 제주에 왜 왔는지 조차 잊고 있다는 자각이 조금 들기 시작한다.
뒤늦은 자각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한 가지를 거칠게나마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자.
잃어버린 사람, 관계, 땅, 언어 그리고 잊었던 화염 같은 사랑과 증오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