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생인 어머니(장정림)가 2022년 8월 29일 새벽 4시경 명성노인요양원(퇴계원 소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430여명이 빈소에 이름을 적었고, 20여 명은 이름도 남김없이 그냥 왔다 갔으며, 160여 명은 코로나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추모하고, 250여 명은 꽃과 조기를 보내왔으며, 또 다른 400여 명은 추모의 글을 남겼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이재명 당대표, 한덕수 국무총리 등 추모의 꽃 150여 개와 근조기 100여 개가 놓여있는 좁은 통로를 따라 키가 크고 단정한 한 노인이 들어옵니다. 이름도 적지 않은 조의금 봉투를 함에 넣더니, 어머니 영정 앞에서 간단히 눈인사하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서서 나갑니다. 식당 안에서도 그 노인은 아무에게도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냥 혼자 앉아 사색하듯 식사를 하십니다. 제가 다가가 다시 인사를 하자 그 노인은 단지 “어머니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일어서서 장례식장을 나갑니다. 따라 나간 제가 장례식장 바깥 한쪽 구석에서 비가 오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연거푸 피우고 있는 그 노인을 보고, 성함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다가갔지만, 저보다 먼저 그냥 조용히 비 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고향인 함평 월야의 아버님 묘소에 어머니를 합장하여 장례식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 아침 5시에 정릉천을 걸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걷던 길을 따라 천천히 청계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함께 종암노인종합복지관에 다녔던 할머니 몇 분을 만나자, 저는 갑자기 솟아나는 눈물을 감출 길이 없어졌습니다. 저의 표정을 살피던 할머니들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하자,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고 야단이십니다. 그제야 저는 저의 어머님 장례식을 치렀지만 어머니 장정림 여사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 것이라는 저의 잘못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지인들의 수첩은 어디쯤 있는 것일까요...
80년 5월 어머니는 죽었을지도 모르는 아들을 찾아 월야에서 광주까지 걸어서 한나절을 갔다가, 온 광주를 헤매고 다니시다가 시체도, 소식도 찾지도 듣지도 못하고 다시 걸어서 한나절을 터덜터덜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를 찾는 형사들이 잠복에 방해된다고 잡아먹어 없어진 우리 집 누렁이 두 마리마저 사라진 빈집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일상으로 돌아오려 합니다. 어머니 상중에 직접 오시거나, 꽃을 보내주시거나, 조의금을 송금해주시거나, 추모의 글을 주신 1000여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특히 이름도 남김없이 추모해준 분들과 경황이 없어 연락을 드리지 못한 분들(특히 어머님의 지인들)과는 이 자리를 통해 추모와 감사의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저의 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이므로 제가 평소 알고 지내던 정념스님의 소개로 흥천사(돈암동 소재)에서 가족끼리 사십구재를 지내게 됨을 역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