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나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걸어서평화만들기” 회원들과 함께 광주 망월동 5.18 민주화운동 국립묘지를 21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참배했다. 박관현, 윤상원 묘소는 내가 매년 참배하는 곳이지만 올해는 제2묘역에 있는 김홍일 묘소에 들려 한참을 서성댔다. 80년 모진 고문 끝에 구속되어 육군군사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안도하고 편안하고 심지어는 행복한 마음까지 들었다면 다른 이들은 이해할까. 다음에 어떻게 되더라도 “죽지 않고 이제 고문은 끝났다. 죽지 않고 내가 김대중 내란음모의 올가미를 벗어났다.”는 마음뿐이었으므로.
고등군법회의에서인가 우리 일행 7~8명은 함께 묶여 군법회의가 열리는 재판장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순서 앞에 김홍일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재판장인 군인과 김홍일이 무슨 말을 어떻게 주고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김홍일이 “아버지를 도운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라고 항변하던 모습을 보고 “김대중 아들답지 못하게 왜 그런 약한 모습을...”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즉흥적 생각이 지금까지 나의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 같다. 김홍일 재판이 끝나고 우리 순서가 되자 우리는 준비한대로 마음의 소리를 외쳤다.
“군사독재 물러나라”
즉시 끌려나와 다시 수감되었다. 광주항쟁을 목격한 나는 당시 조금은 미쳐있었던 것 같고,그런 약한 모습이 조금은 싫었던 모양이다.
2007년 11월 11일, 나는 역사적인 6.15선언이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현실을 보고 사단법인 신정치문화원을 창립하고 6.15선언 이행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라에서 백두까지,걸어서평화만들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 무렵 나는 당시 김홍일의원에게 11월 11일 행사를 설명하고 응원해달라고 했다. 휠체어에 타고 있던 김홍일의원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막대 사탕 4개를 각기 손에 2개씩 들고 두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가 무슨 뜻 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다가가자 김홍일의원은 다시 막대사탕 2개씩 양손에 들고 흔들면서 “빼빼로...”라고 말하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눈에 장난기를 가득 품고 웃었다. 그렇게 나는 행사일이 11월 11일이 빼빼로데이라는 것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 뒤에서 휠체어에 탄 기막힌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해 사람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홍일이 형 이제라도 자주 올게, 그 천진난만한 얼굴 꿈에서라도 한번 보여줘...”